[카테고리:] 내 친구 상택이 그리고 우리 형

  • 5화 : 끝과 시작의 여름

    여름은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.뜨거운 볕이 쏟아지던 8월의 어느 날,고등학교 동창인 용석이와 상택이가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왔다. 오랜만의 만남은 뜨겁게 달궈진 여름날처럼 선명하게 우리를 감쌌다.자취방에 세 명이 모이니 좁은 방은 금세 사람 냄새로 가득 찼다. 며칠 내내 우리는 술을 마셨다.차가운 소주잔에 맺히는 물방울처럼,지난날의 기억과 앞으로의 이야기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. “야, 우리 졸업하고 이렇게 셋이 모인…

  • 4화 : 삼백만원짜리 여름

    여름의 기슭은 언제나 불덩이처럼 뜨거웠다.운동장의 모래가 햇살에 반짝이며 뜨겁게 달아오르던 무렵,나는 군장학생 합격 통지서를 손에 쥐었다. 2학년 올라가서 ROTC 지원을 할 까도 생각했지만,어차피 직업군인을 꿈꾸는 나로서는 군장학금을 받으면장기복무를 해야 한다는 조건이 그렇게 큰 허들은 아니었다 시원한 바람 한 점 없는 자취방에서, 나는 그 종이 한 장을 멍하니 응시했다. 별로 큰 고민 없이 지원을 한 그…

  • 3화 : 자유의지 (Free Will)

    나는 **’자유의지(free will)’**라는 이름을 가진 무전여행 동아리에 들어갔다.철학과 전공 서적에는 관심 없었지만, 이름만큼은 꽤 끌렸다.내가 여행을 좋아했던가..잘 모르겠다. 그저 신입생 행사에서 받아든 학교 소개서 속,‘free will’이라는 멋들어진 이름과 ‘무전여행 동아리’라는 짧은 설명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.가입기간이 되면 무조건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했던 건 그뿐이었다. 인문과학대학 OT에 참석했을 때, 나는 민중가요와 정부 비판 구호들 앞에서 어리둥절했다. 이게 과연 신입생…

  • 2화 : 청춘

    삐삐가 허리춤에서 요란하게 울었다.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각. 액정에 뜬 건 상택이가 남긴 음성메시지였다.이 시간에 미친… “아, 이 자식 진짜…” 나는 뻐근한 몸을 일으켜 담배를 찾았다. 형은 이미 깊이 잠들어 규칙적인 숨소리를 뱉어내고 있었다. 대구의 자취방은 딱 그만큼의 공간이었다. 두 개의 이부자리와 책상 하나, 그리고 라면과 김치 냄새가 섞인 공기. 그게 우리 세계의 전부였다.…

  • 1화 : 추억

    밤 열한 시. 책상 앞. 전자담배가 느릿하게 깜빡인다.재떨이엔 반쯤 탄 스틱이 눕고,창밖으론 자동차가 도로 금속선을 긁듯 지나간다. 방 안의 공기는 얇다. 이 얇음은 오래전부터 내 곁에 있었다.얇은 벽, 얇은 담요, 얇은 숨, 얇은 밤.얇다는 건 잘 찢어진다는 뜻이지만,잘 겹친다는 뜻이기도 하다. 나는 얇은 것들을 겹쳐서 살아왔다.기억과 이름과 습관을, 한 장 한 장. ​ 이야기는 바다에서…