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카테고리:] 내 친구 상택이 그리고 우리 형

  • 10화 : 부산으로…

    창원의 밤은 소주라는 독에 절어 얇은 막처럼 희미하게 사라졌다. 아침 숙취는 지독했고, 우리는 대구로 돌아가는 버스 터미널 근처에서 국밥을 말아먹었다. 돈은 바닥을 보였다. 지갑에 남은 거라곤 고속버스 요금 몇 장과 지폐 몇 개가 전부였다. 돌아가기엔 뭔가 허전했고, 허무했다. 낯선 도시에서의 이틀이 너무 짧은, 방향을 잃고 부유하는 담배 연기 같았다. “야. 우리 그냥 부산 갈까?” 상택이가…

  • 9화 : 창원의 밤

    고속버스 엔진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는, 희미하게 들려오는 상택이의 콧노래와 뒤섞여 알 수 없는 박자를 만들어냈다. 남쪽으로 향하는 창밖 풍경은 빠르게 지나갔고, 대구의 얇은 공기와는 확연히 다른, 눅진하고 무거운 공기가 버스 안을 감쌌다. “야, 창원 가면 바닷가 보이나?” 선욱이가 물었다. 이미 군대까지 다녀온 녀석은, 이 모든 여정을 그저 소풍처럼 여기는 눈치였다. 나는 등받이에 기대어 아픈 오른쪽…

  • 8화 : 젊은날의 비틀림

    시간은 늘 그렇게 간단하게 흘러간다.대단한 사건 같은 건 없었던 것 같은데,돌아보면 어느새 계절이 바뀌어 있고,그 사이에 사람 하나가 졸업을 하고, 발령을 받고, 짐을 싼다. 형님이 그랬다. 형님은 결국 대학을 마쳤고,충주 쪽 특수학교로 발령을 받았다. 축하한다는 말보다 먼저 나온 건 딴소리였다. “충주? 거기 완전 시골 아니가?”“글치 뭐”“좀 좋은데 가지 그참나.”“자식이..돈 버는데 장소가 중요하나?” 대구에서 마지막으로 옮긴…

  • 7화 : 여행

   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흘러친구들이 하나 둘씩 군대를 가기 시작했다. 고등학교 친구 용석이가 제일 먼저 갔고그 놈 성격에 맞게 해병대에 자원하였다. 그러던 어느날 상택이로부터 연락이 왔다. “야. 여행 가자.” 이 새끼는 원래 이런 식으로 말을 시작한다.설명 없음. 계획 없음. 갑자기 여행.근데 그게 또 묘하게 자연스러워서나도 별 거 없이 대답했다. “어디.”“부산.”“그런데 갑자기 왜?”“나 군대 간다.” “헐”“일단 대구로…

  • 6화 : 좁은 방의 겨울 전쟁

    겨울 방학이었다.형이 산 486 컴퓨터는 묘하게 무겁고 둔탁했다.자취방엔 책상도, 의자도 없었고 우리는 바닥에 엎드려 모니터 앞에 누웠다.서늘한 공기 속에서 브라운관의 열기만이 우리 손끝을 데웠다. MS-DOS 검은 화면에 ‘KOEI’ 붉은 글씨가 뜨자,형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.“됐다, 시작하자.”이윽고 삼국지 2 타이틀이 떠올랐다.모니터 한 대, 키보드 한 대.그게 전장의 전부였다. “야, 이번엔 내가 조조다.”“형은 맨날 조조 한다 아이가?”“그라믄 네가…

  • 5화 : 끝과 시작의 여름

    여름은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.뜨거운 볕이 쏟아지던 8월의 어느 날,고등학교 동창인 용석이와 상택이가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왔다. 오랜만의 만남은 뜨겁게 달궈진 여름날처럼 선명하게 우리를 감쌌다.자취방에 세 명이 모이니 좁은 방은 금세 사람 냄새로 가득 찼다. 며칠 내내 우리는 술을 마셨다.차가운 소주잔에 맺히는 물방울처럼,지난날의 기억과 앞으로의 이야기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. “야, 우리 졸업하고 이렇게 셋이 모인…

  • 4화 : 삼백만원짜리 여름

    여름의 기슭은 언제나 불덩이처럼 뜨거웠다.운동장의 모래가 햇살에 반짝이며 뜨겁게 달아오르던 무렵,나는 군장학생 합격 통지서를 손에 쥐었다. 2학년 올라가서 ROTC 지원을 할 까도 생각했지만,어차피 직업군인을 꿈꾸는 나로서는 군장학금을 받으면장기복무를 해야 한다는 조건이 그렇게 큰 허들은 아니었다 시원한 바람 한 점 없는 자취방에서, 나는 그 종이 한 장을 멍하니 응시했다. 별로 큰 고민 없이 지원을 한 그…

  • 3화 : 자유의지 (Free Will)

    나는 **’자유의지(free will)’**라는 이름을 가진 무전여행 동아리에 들어갔다.철학과 전공 서적에는 관심 없었지만, 이름만큼은 꽤 끌렸다.내가 여행을 좋아했던가..잘 모르겠다. 그저 신입생 행사에서 받아든 학교 소개서 속,‘free will’이라는 멋들어진 이름과 ‘무전여행 동아리’라는 짧은 설명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.가입기간이 되면 무조건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했던 건 그뿐이었다. 인문과학대학 OT에 참석했을 때, 나는 민중가요와 정부 비판 구호들 앞에서 어리둥절했다. 이게 과연 신입생…

  • 2화 : 청춘

    삐삐가 허리춤에서 요란하게 울었다.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각. 액정에 뜬 건 상택이가 남긴 음성메시지였다.이 시간에 미친… “아, 이 자식 진짜…” 나는 뻐근한 몸을 일으켜 담배를 찾았다. 형은 이미 깊이 잠들어 규칙적인 숨소리를 뱉어내고 있었다. 대구의 자취방은 딱 그만큼의 공간이었다. 두 개의 이부자리와 책상 하나, 그리고 라면과 김치 냄새가 섞인 공기. 그게 우리 세계의 전부였다.…

  • 1화 : 추억

    밤 열한 시. 책상 앞. 전자담배가 느릿하게 깜빡인다.재떨이엔 반쯤 탄 스틱이 눕고,창밖으론 자동차가 도로 금속선을 긁듯 지나간다. 방 안의 공기는 얇다. 이 얇음은 오래전부터 내 곁에 있었다.얇은 벽, 얇은 담요, 얇은 숨, 얇은 밤.얇다는 건 잘 찢어진다는 뜻이지만,잘 겹친다는 뜻이기도 하다. 나는 얇은 것들을 겹쳐서 살아왔다.기억과 이름과 습관을, 한 장 한 장. ​ 이야기는 바다에서…